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통일 (문단 편집) ====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의 전쟁 ==== [[1859년]] 1월 1일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짐은 우리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와 귀국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의 관계가 과거처럼 우호적이지 않은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발언으로 인해 양국간에 전운이 감돌고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국제회의를 소집해 이탈리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제의하였다. 전술한 것처럼 영국은 현상 유지를 원했기에, 1859년 2월 코울리(H. W. Cowley)를 [[빈(오스트리아)|빈]]에 파견하여 '오스트리아는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사르데냐-피에몬테를 중립화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나 사르데냐-피에몬테는 평화를 원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또한 이탈리아에 대한 권익을 포기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 중재안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청년들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밀입국해 사르데냐-피에몬테군에 입대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들을 롬바르디아로 귀환시킨다는 명분을 내걸고, 4월 초에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4월 23일 사르데냐-피에몬테에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물론 카보우르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몬테 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했지만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나폴레옹 3세가 친정하는 프랑스군과 역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친정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군 연합군은 5월 20일 몬테벨로(Montebello)에서 3배가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6월 4일 마젠타(Magenta) 전투[* 색깔 푹시아(Fuchsia)가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이름이 [[마젠타]]로 바뀌었다.][*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이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나폴레옹 3세는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을 마장타 공작에 봉하였다.]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패배한 오스트리아군은 롬바르디아에서 후퇴해 사각 요새(Quadrilatero)[*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사이에 있는 페스키에라(Peschiera), [[베로나]](Verona), [[만토바]](Mantova), 레냐고(Legnago)의 4개 도시에 세워진 요새를 가리킨다. 이 4개 요새를 이은 모양이 [[사각형]]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까지 후퇴했다. 프랑스와 사르데냐-피에몬테 연합군은 [[밀라노]]를 점령하고 프로이센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마젠타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자마자 역시 친정에 나섰고 세 나라의 군주가 친정한 가운데 양군은 6월 24일 솔페리노(Solferino)에서 또 다시 격돌[* 한편 솔페리노 전투는 [[국제적십자위원회]] 창설의 배경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하였다. 전투 자체는 무승부에 가까웠으나 서쪽으로 진격했던 오스트리아가 다시 사각 요새로 후퇴하면서 결과적으로 프랑스&사르데냐-피에몬테 연합군이 승리하였다. 그런데 솔페리노 전투를 계기로 나폴레옹 3세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그는 카보우르와의 협의 없이 7월 11일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직접 만나 휴전에 합의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의중이 이렇게 갑자기 변한데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제기되었다. 1. 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859년 5월 토스카나, 모데나, 파르마 등 중부 이탈리아 일대의 소국들에서 혁명이 일어나 기존의 지배자들이 축출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 배후에 카보우르가 연결되어 있었다. 혁명으로 세워진 신정권들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의 통합을 목표로 삼았고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의 목숨을 대가로 강해진 사르데냐-피에몬테가 그의 영향권 밖으로 벗어나 프랑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갈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1. 오스트리아가 전투에서 패퇴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프로이센 문제가 제기되었다. 4월 오스트리아 [[대공(작위)|대공]](大公) 알브레히트(Albrecht von Österreich-Teschen)가 [[베를린]]을 방문해 프로이센에 연합전선을 제의했다. 프로이센은 이를 거절하였으나 6월에 13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를 자극하였다. 프랑스가 남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해야 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1.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가 예상보다 커진 데다가 오스트리아가 사각 요새로 후퇴하며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는 1859년 7월 12일 [[빌라프란카 조약]]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리아는 만토바와 페스키에라 요새를 제외한 롬바르디아 지방을 프랑스에 할양하고 프랑스는 이 지역을 다시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할양할 수 있다. > >2.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계속 보유한다. > >3. 이탈리아의 구 지배자들을 다시 복귀시킨다. 그러나 혁명지도자들은 사면한다. 휴전협정은 1859년 11월 10일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빌라프란카 조약이 체결되자 카보우르는 격분하며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얼마 후 복귀했다. 그리고 조약 내용대로 프랑스가 [[롬바르디아]]를 사르데냐-피에몬테에 양도하면서 프랑스의 지원은 끝났다. 하지만 조약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는데 혁명이 일어난 중부 이탈리아에 진주한 사르데냐-피에몬테는 구 지배자들을 복귀시킬 의사가 없었고 프랑스 역시 사르데냐-피에몬테에게 구 지배자들을 복귀시키라고 강요할 마음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격분했지만 베네치아를 제외한 북이탈리아 전역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린 마당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